2010년 10월 5일 화요일

빛의 연금술사 윌리엄 터너

t01.jpg Fingal's Cave, 1832
Oil on canvas, 90.9 x 121.4 cm, Yale Center for British Art, New Haven

윌리암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 - 1851)는 런던 출생의 영국 풍경화가로, 그의 그림에선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마술를 느낄 수 있습니다.  1775년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가이며 건축가인 토마스 말턴과 건축가 토마스 하드워크 밑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건축 조감도를 그리거나, 시골 풍경 및 성의 정밀도 등을 그렸습니다.
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습니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 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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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rly Morning, 1819
Watercolor, 22.4 x 28.7 cm, Tate Gallery, London

터너는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에 국내 및 유럽대륙을 두루 여행을 하였는데, 이는 비행기도 없고 기차나 자동차도 드물었던 당시로선 매우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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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urning of the Houses of Lords and Commons, 16th October, 1834, 1835
Oil on canvas, 92 x 123 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N.푸생, C.롤랭의 고전 주제적 풍경화에 크게 영향을 받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풍경화인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후 그의 그림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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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n, Steam and Speed, 1844
Oil on canvas, 90.8 x 121.9 cm,National Gallery, London

18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의 그림에는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후의 작품인 '전함 테메레르(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1842)', '비,증기,속력(1844)'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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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
Oil on canvas, 91 x 122 cm, National Gallery, London

뛰어난 컬러니스트였던 터너는 인상파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 1851년 12월 런던의 첼시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가 소장하였던 약 2만 점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후 국가에 유증(遺贈)되어, 그 대부분이 현재 런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010년 9월 8일 수요일

폴 세잔

<눈 내린 에스타크>
< 목맨사람의 집>                                                            <세잔 부인>

 1839년 ~ 1909년, 프랑스 대표적 화가, 현대미술의 아버지,

 " 빛은 재현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색채를 통해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인상주의에서 근대미술로 가는 길을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2010년 9월 1일 수요일

물랭루즈에서, 툴루즈 로트렉

 툴루즈 로트렉의 '물랭루즈에서'라는 그림입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1892년 작품입니다. 그는 19세기 말 컬러 석판 인쇄술 분야를 개척했고, 현대적인 광고 전단지와 포스터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화가입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천성적으로 152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은 키에 기형적인 외모를 타고 났기에 불우한 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단지 백지와 싸울따름이다"라고 할 정도로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데만 열중했던 그는 한줌의 향락과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모여드는 물랭루즈의 군중들을 통해 인간들의 속성과 삶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평생 신체적 불구로 인해 뭇 여성, 심지어 창녀들에게 조차 기만당했던 툴루즈 로트렉. 그는 오히려 그런 여성들을 화폭에 담으면서 세상에 대한 우울한 시선, 비극적인 냉소주의를 표현한 것이지요.

 그리고 생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남깁니다.

"어머니! 진정으로 제겐 당신 뿐이었습니다"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해돋이 : 인상파 모네 작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 1840~1926)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일출(日出)》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생겼다. 햇빛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Impression, Sunrise. 1873 [해돋이, 인상] 1873년

- 캔버스 위 유채. 파리 마르모탕미술관 소장.


 1874년에 한 사진사의 작업실에서 열린 전시회에 전시된 그림으로 어떤 비평가가 이 그림의 제목이 특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미술가들을 조롱조로 '인상주의자'라고 불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르누아르, 세잔, 피사로 등의 화가들이 같이 작품을 출품하였다. 모네는 자신의 작업장 창문을 통해서 안개가 잔뜩낀 르아브르(Le Havre)항의 일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다. 카달로그에 작품평을 무엇으로 하겠느냐는 질문에 '르아브르항의 전경'이라고 이름짓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인상(Impression)이라고 하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카달로그를 보니 '해돋이 인상'(Impression, Sunrise)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 전람회를 보러온 르루아라는 한 미술기자가 모네의 그림의 이름을 따서 '인상파전람회'라고 하는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기도하는 손

 독일 뉴른 박물관에 '기도하는 손'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단지 모아 쥔 두 손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 무척이나 가난했기 때문에 미술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자기의 학비를 댈 수가 없었던 두 친구는 의논을 했다.

 그중 하나가 "뒤러야, 우리가 도무지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데 이렇게 해보자.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렴, 나는 식당에 가서 돈을 벌어 너의 학비를 대겠다. 네가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 또 네가 나를 위해서 지원해 주면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니?"라고 제의하면서 앨버트 뒤러를 위해서 땀 흘리며 쉬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매달 이 뒤러에게 학비를 보냈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미술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그의 그림도 서너 편씩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뒤러가 학교를 졸업한 후 그 친구를 찾아갔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친구는 마침 식당의 한 모서리에서 친구 뒤러를 위해서 무릎 끓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 저의 손은 이미 식당에서 일하다 굳어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못 쓰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을 뒤러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소서!"

 옆에서 지켜보던 앨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기도하고 있는 친구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자기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그러자 뒤러는 붓을 들어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곧 앨버트 뒤러의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다.

출처 :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 오마이뉴스